규칙을 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BENURD가 옷을 대하는 태도
디자인 가이드부터 만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막상 앉으니 정할 게 없었습니다. 첫 티셔츠를 만들어보고 나서야 기준이 하나씩 생겼습니다.
BENURD의 브랜드 디자인 규칙은 하나입니다. 규칙을 먼저 정하지 않는다. 폰트도 선 굵기도 고정하지 않고, 그날 손에 잡히는 도구로 그립니다. 지금 기준을 정해버리면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못 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브랜드를 시작하면 디자인 가이드부터 만든다고들 합니다. 색은 무엇, 폰트는 무엇, 로고 여백은 몇 mm. 저도 그게 맞는 순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앉으니 정할 게 없었습니다. BENURD는 제가 스물두 살에 시작한 패션 브랜드인데, 그때는 만들어본 옷이 한 장도 없었습니다. 만들어본 것이 없는데 기준부터 세우는 게 이상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낙서 여백에 남은 얼굴이 브랜드 캐릭터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그 얼굴을 옷에 처음 올려본 이야기가 이번 글입니다.
규칙을 정하지 않겠다고 노트에 적어둔 문장

“갑자기 두꺼운 펜을 들고 싶으면 들고, 글씨도 더 크게 쓰고 싶으면 쓰고.”
이름을 정하던 무렵 노트에 적어둔 문장입니다. 디자인 원칙을 쓰려고 적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 생각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이게 유일한 원칙에 가깝습니다.
같은 페이지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추구하는 내 인생을 살려고.” 옷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고가 매번 다릅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종이를 보는 게 빠릅니다.

이건 얇은 볼펜으로 쓴 것들입니다. 이름을 고르던 중이라 빠르게 여러 번 써봤습니다. 글씨가 작고 선이 가늡니다.

이건 같은 이름을 굵은 펜으로 쓴 것입니다. 같은 날인지 다른 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쓰고 싶은 크기가 달랐던 건 분명합니다.
지금 쓰는 로고는 굵은 쪽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얇은 버전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얇게 쓸 자리가 생기면 그때 쓰려고 합니다. 로고 옆의 비니 쓴 캐릭터도 같은 종이에서 나왔습니다.

한 장에 둘 다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지금은 이 상태가 브랜드를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봤습니다.

누런 봉투에 옷을 그릴 때는 이름을 세로로 내려썼습니다. 획도 더 두껍고 각졌습니다. 정해둔 형태가 없으니 그때 자리에 맞는 모양으로 씁니다. 세 번 쓰면 세 번 다릅니다.
봉투든 노트든 자리가 보이면 그립니다
도구만 그런 게 아닙니다. 누런 봉투든 뭐든 그 자리에 있는 데다 그립니다. 자리가 보이면 일단 그리고 봅니다.

이것도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제가 만든 캐릭터는 아니고 손 풀려고 그린 연습인데, 선을 굵게 잡았고 색도 하나만 썼습니다. 노트에 볼펜으로 흘려 쓰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엇을 쥐고 어디에 그리느냐에 따라 나오는 게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로 정해두고 싶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좇지 않는다는 것
이름을 정할 때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옷은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니니까.” 모두가 좋아할 옷을 만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대중적인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 만드는 분들이 이미 많습니다. 제가 거기에 하나 더 얹는 것보다, 제가 입고 싶은 걸 만드는 쪽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태도가 이름에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BENURD가 “너드가 되자”는 뜻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규칙은 옷을 만들어보고 나서 생길 겁니다
영영 안 만들겠다는 건 아닙니다. 옷을 몇 개 만들어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을 겁니다. 이 굵기는 원단에서 안 보인다든가, 이 크기는 프린트가 깨진다든가.
그런 건 책상에서 정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봐야 압니다. 미리 정한 기준은 지키느라 애쓰게 되고, 만들면서 알게 된 기준은 그냥 따르게 됩니다. 저는 후자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다 정해놓고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브랜드들을 보면 조급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지금 급하게 정해서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 기다리던 기준은 나중에 색 여섯 개와 서체로 정리됐습니다.
첫 티셔츠를 한 장 만들어봤습니다
위에서 만들어봐야 안다고 썼는데, 실제로 한 장 만들어봤습니다. 티셔츠 제작은 처음이었습니다. 파는 물건은 아닙니다. 흰 면티에 그동안 그린 것들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색은 검정과 빨강 둘뿐입니다.

BENURD 레터링에 빨간 원, 비니를 쓴 캐릭터가 WHERE THE FASHION 팻말을 든 그림, NURD POP과 NURDBEHIP처럼 지나간 이름들, 토끼와 작은 왕관까지 한 면에 다 넣었습니다. 노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자리에 모은 셈입니다.


흰 티에 올린 이 그림을 검정 티에 올리면 어떨지 궁금해서 색만 뒤집어 봤습니다(AI로 색을 바꿨습니다). 빨간 부분(둘레 원·왕관·FASHION!·밑줄)은 그대로 빨강으로 남겼습니다. 처음 만든 판에서는 빨강이 전부 흰색이 돼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아직 실제로 만들 계획은 없습니다.
실물을 보고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생각보다 너저분합니다.

종이에서는 여백이 넉넉해서 괜찮아 보이던 것들이, 옷 위에 모이니 서로 부딪힙니다. 무엇을 빼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림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드로잉도 스케치도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서 연습장을 직접 만들어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 한 장이 없었으면 몰랐을 겁니다. 책상에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안 보이던 것이 옷으로 나오니까 바로 보였습니다. 기준은 이렇게 하나씩 생기는 것 같습니다.
첫 티셔츠에서 알게 된 것 정리
한 장 만들어보고 알게 된 건 네 가지였습니다. 다음에 만들 때 제가 다시 볼 목록입니다.
- 굵은 선은 원단에서도 산다. 종이에서 흐릿하던 부분이 오히려 더 또렷해졌습니다.
- 작은 낙서는 옷 위에서 뭉친다. 종이에서 여백이 넉넉해 괜찮아 보이던 것들이 서로 붙어 보였습니다.
- 여백은 종이 기준으로 잡으면 모자란다. 같은 간격인데 옷에서는 좁게 느껴졌습니다.
- 책상에서는 안 보인다. 옷으로 뽑아보고 나서야 무엇이 문제인지 보였습니다.
정답을 먼저 찾으려다 시간을 썼습니다
정답을 먼저 찾으려다 시간을 꽤 썼습니다.
저도 시작할 때 브랜드 만드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컨셉을 정하고 무드보드를 만들고 가이드를 짜라고 나옵니다. 다 맞는 말인데 그때 저한테는 순서가 안 맞았습니다. 정리할 게 있어야 정리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렸습니다. 몇 장이 쌓이고 나서야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금 보였습니다. 기준은 그다음에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흰 티는 그 뒤에 색을 바꿔 다시 만들었습니다 — 흰 티가 부담이라 색을 바꿨습니다에 그 이야기를 적어 뒀습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내 그림을 티셔츠에 프린트하면 어떻게 나오나요?
굵은 선은 원단 위에서도 그대로 살았습니다. 오히려 종이에서 흐릿하던 부분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문제는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종이에서 여백이 넉넉해 괜찮아 보이던 낙서들이 옷 위에 모이니 서로 붙어 뭉쳐 보였습니다. 저도 처음이라 제작 방식까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옷으로 뽑아보기 전에는 이걸 알 수 없었습니다.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를 꼭 먼저 만들어야 하나요?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를 저는 먼저 만들지 않았습니다. 색·폰트·여백을 먼저 정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는데, 만들어본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준부터 세우는 게 이상했습니다. 정해두고 지키는 것보다, 만들다 알게 된 쪽이 지키기 쉬웠습니다. 몇 개 만들어보고 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뒤에 컬러 여섯 개와 서체가 정리됐습니다. 먼저 정한 기준이 아니라 그려놓고 보니 남아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BENURD 로고는 왜 매번 다른가요?
폰트를 정해두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날 손에 잡히는 펜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같은 종이에 얇은 볼펜으로 쓴 것과 굵은 마커로 쓴 것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지금 로고는 굵은 쪽에서 나왔지만 얇은 버전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대중적인 옷은 만들지 않나요?
대중적인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모두가 좋아할 옷을 만들 자신이 없었고, 잘 만드는 곳이 이미 많습니다. 이미 많은 곳에 하나 더 보태기보다, 제가 입고 싶은 걸 만드는 쪽에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규칙이 없으면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나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아직 만들어본 것이 적어 무엇을 고정해야 할지 모르는 단계라, 지금은 흔들리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티셔츠는 살 수 있나요?
티셔츠는 아직 팔지 않습니다. 첫 한 장을 만들어본 단계이고, 지금 상태로는 그대로 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빼야 할지 정리되면 그때 다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여기서 만든다는 건 제가 입어볼 한 장을 더 지어본다는 뜻이지 내다 판다는 뜻이 아닙니다. 판매 계획은 세워둔 것이 없고, 출시 일정이나 알림 안내도 준비해둔 것이 없습니다.
첫 티셔츠를 만들어보고 뭘 알게 됐나요?
여백이 얼마나 중요한지입니다. 종이에서는 넉넉하던 사이가 옷 위에서는 붙어버렸습니다. 굵은 레터링은 원단에서도 살았지만 작은 낙서들은 뭉쳐 보였습니다. 책상에서는 안 보이던 것이 옷으로 나오니 바로 보였습니다.
20~30대가 자기 브랜드를 시작할 때 규칙을 먼저 정해야 하나요?
브랜드 규칙을 저는 먼저 정하지 못했습니다. 정리할 것이 있어야 정리를 하는데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브랜드 만드는 법을 검색하면 컨셉을 정하고 무드보드를 만들고 가이드를 짜라고 나오는데, 만들어본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그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렸고, 몇 장 쌓이고 나서야 제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 보였습니다.
혼자 하는 1인 브랜드도 시작할 수 있나요?
저는 혼자 하고 있습니다. 팀도 매장도 없고, 디자인 가이드를 먼저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낙서 한 장에서 이름을 정하고, 첫 티셔츠를 직접 만들어보고 나서야 기준이 하나씩 생겼습니다. 정답을 아는 게 아니라 제가 지나온 순서를 그대로 적어두고 있습니다.
첫 티셔츠는 어떤 원단에 만들었나요?
흰 면티 한 장에 그동안 그린 것들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건 굵은 선은 원단 위에서도 살고, 작은 낙서는 옷 위에서 뭉쳐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쓸 원단은 아직 고르지 않았습니다 — 원단과 봉제는 배우는 중이라 몇 개 더 만들어보고 정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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